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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있는 사람은 말해 주세요, 말이 돼요? 눈 있는 사람은 보세요, 보여요? 귀 있는 사람은 들어봐요, 들리나요? 당신들은 봤을 거예요, 들었을 거예요, 상처로 사람을 만난다는 걸. 상처 때문에 사람이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을. 그러나 당신들은 내가 당한 상처에 뭘 줄 수 있나요? 기념 촬영을 하시는 건가요? 쑈쑈쑈입니까? 열 살의 나이에 맨발로 내가 헤맨 동성로의 겨울밤을 짐작이나 하겠어요? 미군이 상륙하고, 왜들 이래요? 다시 중국군들이 와글와글 내려오고, 이게 무슨 짓들이에요? 추워요, 배고파요, 보고 싶어요, 가혹한 시대로 내몰려진 어린 것들. 책임져요. 누가 책임을 지나요? 거기, 책임자 있어요? 나와 주세요. 흉터를 보여 주세요. 난 날마다 눈물로 치유를 받았어요. 난 날마다 고통의 소복을 입어요. 아, 난 날마다 아프고 날마다 울어요. 세상에서 가장 가련한 년! 나는 이 세상의 맨바닥에 있었어요. 택시를 타는 남편도 몰라요. 아이들도 상처는 상속되지 않나 봐요. 무책임한 시대에는요. 뭐가 뭔지 통 모르겠어요. 난 학교도 못 나왔어요. 무식한 년이에요. 그러나 이걸 (가슴을 가리킨다) 적어 붙인 케이비에스 본관 벽 앞에서 난 또 얼마나 울었는지, 얼마나 서러웠는지, 억울했는지, 망쳐 버린 숙명들 앞에서!

 

중학생 시절에 연극부를 했는데, 『백 세 개의 모노로그』라는 책에서 독백 하나를 골라 연습을 시켰다. 그때 파견을 나온 강사가 골랐던 것이 위의 내용이다. 황지우 시인의 동명 시를 바탕으로 독백을 쓴 것이다. 좀 더 처절하게 연기하라고 가르침받았던 것이, 그 선생이 직접 연기할 때 들었던 목소리와 말투가 아직도 기억난다.

 

'상처로 사람을 만난다는 걸. 상처 때문에 사람이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생각날 때마다 꺼내 읽으면 그간 쌓아 온 내 경험치가 가늠이 되는 글이다. 올해도 나는 꽤 자랐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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